드라마 왕국 대한민국에서도 유독 '스포츠'를 소재한 한 드라마는 불행한 '필패'의 역사를 이어왔다. 1994년 방송된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전국에 농구 열풍을 일으키며 흥행에 성공하자, 이후 화려한 성공을 꿈꾸며 많은 스포츠 드라마가 등장했지만, 대부분 빛을 발하지 못하고 어두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펀은 기획연재 '스포츠 드라마 흑역사'를 통해 지금까지 흥행에 실패했던 스포츠 드라마의 안타까운 사연과 깨알같은 재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1. '차라리 슛돌이를 보고말지' 본격 K리그 드라마(?) '맨땅에 헤딩'
방송 기간 및 시간 : 2009년 9월 9일 ~ 11월 4일 / 매주 수, 목 밤 9시 55분
방송사 : MBC
최고 시청률 : 7.2% (TNmS, 전국 기준)
최저 시청률 : 3.3% (TNmS, 전국 기준)
명대사 : "나는 케이리거드아아!", "오~ 감자~",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대요"
쏟아진 기대, 초반은 대박 예감?
대한민국 4대 프로 스포츠 중 방송에게 가장 불만이 많을듯한 종목은 역시 축구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종목에 비해 유난히 중계 문제에 관해 말이 많았던 프로축구는 언제나 방송 콘텐츠에 목말라 있었다.
2009년, K리그(現 K리그 클래식) 팬들은 뜻밖의 희소식을 듣게 된다. 바로 K리그를 소재로 한 스포츠 드라마가 제작된다는 것. 생중계를 늘린다는 소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최초로 K리그가 드라마에서 다뤄진다는 사실에 많은 팬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게다가 '맨땅에 헤딩' 주인공의 실제 모델 역시 현직 K리거였다. 내셔널리그 울산 현대미포조선에서 활약하다가 강원FC로 이적, 골 폭풍을 일으켰던 김영후의 모습이 '맨땅에 헤딩' PD의 눈에 띄었고, 이를 토대로 '맨땅에 헤딩'의 스토리가 만들어진 것. 명대사 중 하나로 꼽히는 "해뜨기 전에 가장 어둡대요" 역시 김영후의 어머니가 김영후에게 했던 말이었다.
축구팬 뿐만 아니라 동방신기 팬들에게도 '맨땅에 헤딩'은 큰 관심이었다. 바로 동방신기의 정윤호(유노윤호)가 연기자로 데뷔하게 된 것. 그는 "진짜 맨땅에 헤딩하겠다"며 연기에 대한 강한 의욕을 드러냈고, 당시 해체로 인해 어수선했던 동방신기의 이미지를 다시 회복하려고 했다.
정윤호(유노윤호)와 함께 드라마에 참여한 캐스팅 라인업도 나름 '빵빵하다'고 표현할 만한 수준이었다. 고아라, 이윤지 등 미녀 스타가 '차봉군' 역으로 주연을 맡은 정윤호의 지원 사격에 나섰다. 임채무, 박철민, 윤여정 등 연기파 조연도 가세했다.
첫 방송 전부터 일부 공개된 이미지컷에 K리그 팬들은 더욱 기대를 모았다. K리그 인기 구단 중 하나인 FC서울을 딴 'FC소울', 대한민국 축구의 전설 차범근의 이름을 딴 '차봉군'이란 캐릭터 등 축구팬이라면 친숙하게 느껴질 만한 소재들이 들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유노윤호의 연기 데뷔작이 꽤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겠다는 예측이 점점 많아졌다.
방송 시작, 시청자도 축구팬도 '멘붕'
하지만, 문제는 방송이 시작하면서 등장했다. 정윤호를 비롯한 주연급 배우들의 연기력 논란이 벌어진 것. 지금은 '응답하라 1994'를 통해 정상급 여배우로 성장한 고아라도 당시에는 그저 연기를 배우는 과정에 있었다. 여러 언론들도 "기본적인 대사, 지문, 시선 처리 등에 문제가 있다"고 혹평을 쏟았다.
▲ 드라마좀 봤던 사람들이라면 1화부터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을듯 하다
개연성이 부족한 스토리도 한몫 했다.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고 마치 단편 시트콤을 보는 느낌이라는 것이 시청자들의 평가. 특히, 갑자기 차봉군이 한강에 빠져 기억상실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장면은 많은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순간 판타지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수도 있을 정도.
게다가 시청률 부진의 원인에는 경쟁작의 선전도 있었다. 동시간대에 KBS는 윤은혜, 정일우가 출연하는 '아가씨는 부탁해'가, SBS는 유오성, 성유리 등이 나오는 '태양을 삼켜라'가 방송됐다. 둘 다 '맨땅에 헤딩'이 경쟁하기에는 너무 강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맨땅에 헤딩' 중 가장 '기가 막히다'는 평가를 받는 장면. 4분부터 보면 이해가 빨라진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를 가장 크게 기대했던 축구팬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들 역시 실망감으로 가득하긴 마찬가지였다. K리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뤄 사람들에게 K리그를 홍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랐지만, 오히려 축구에 대한 얘기는 상대적으로 적었고 러브 스토리에 치중했던 것. 정윤호와 고아라, 이윤지의 러브 스토리가 극 전개의 대부분을 이뤘다.
축구경기에 대한 묘사도 부족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맨 앞 줄만 가득하고 나머지는 텅 빈 관중석, 슬로우 모션을 보는듯한 개인기 등 어설픈 축구 연기는 오히려 몰입도를 떨어뜨렸다. 한 네티즌은 "차라리 '날아라 슛돌이(어린 꼬마들의 축구 경기를 다뤘던 예능 프로그램)'가 더 박진감 넘친다"고 일갈하기도.
조기종영의 굴욕, 출연 배우들은 '폭풍 성장'
결국, 20부작으로 예정되어 있던 '맨땅에 헤딩'은 16부 만에 조기종영하는 굴욕을 맛봤다. 마지막회에서 정윤호는 FC소울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활약을 선보이고, 고아라와 연애를 시작하며 '같이 맨유에 가자'는 훈훈한 다짐을 하며 마무리했지만, 드라마 밖에서는 '정말 시청률이 맨땅에 헤딩했다'는 냉혹한 평가가 이어졌다.
재밌는 사실은 이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들, 특히 정윤호와 고아라의 이후 행보다. 연기력 논란으로 쓴맛을 봐야 했지만 고아라는 '응답하라 1994'를 통해 폭풍 성장한 모습을 보였고, 정윤호 역시 '야경꾼 일지'에서 물오른 연기로 연기력 논란을 끝내는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윤호도, 고아라도 잊고 싶은 과거 '맨땅에 헤딩'
하지만, 과거를 지울 수는 없다. 정윤호는 지난 7월 방송된 '별바라기'에서 "'맨땅에 헤딩' 방영 당시 '남자인 내가 봐도 못한다'는 댓글을 봤다"는 팬의 고백을 듣기도 했다.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정윤호의 연기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된 것. "앞으로도 많이 질타해달라. 더욱 고민하겠다"는 그의 당시 대답은 '맨땅에 헤딩'으로 인해 그 역시 성장 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고아라 역시 마찬가지다. '응답하라 1994'에서 성나정 역에 '완벽 빙의'했던 그녀도 '맨땅에 헤딩'은 지우고 싶은 과거일듯 하다. 예능 프로에 출연해 개그맨 김원효에게 "반올림 찍더니 '맨땅에 헤딩'에서 진짜 맨땅에 헤딩했다"는 독설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맨땅에 헤딩'은 정윤호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연기력을 가다듬는 하나의 자극제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맨땅에 헤딩' 이후 아직까지 K리그를 소재로 한 드라마는 나오지 않고 있다. 폭발적이지는 않지만 조금씩 팬층이 늘어나고 있는 대한민국 프로축구 K리그. 다시 K리그 드라마가 나온다면 2009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까? 단, '맨땅에 헤딩'처럼 '축구의 탈을 쓴 로맨스 드라마'가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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